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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나의 도시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 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에서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 살갗이었다가
 랩도 블루스도 기타도 현도 방망이도 철판도 짐승의 가죽으로 소리 내던 북들도 젖고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생선국 끓이던 솥도 고기 튀기던 냄비도 젖고 젓가락 숟가락 사이 들락거리던 버스도 택시도 어머니, 연을 끊지요, 라는 내용이 든 편지도 젖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잠기고 물에 들어가면서도 고무신 하나 남기지 않고
 나의 도시 도시의 장벽마다 색소병을 들고 울던 아이들도 젖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 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여,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

 물 위에 뜬 건 무의식뿐, 무의식뿐,
 건덩거리는 입술을 위로 올리고 죽은 무의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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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9
신현림,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사진 출처 :  고요 @iw0ntbe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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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
홍진경, 정신에게

정신에게

 

취향과 감흥이 다른 여러사람 알면 뭐 해.

그것은 자랑거리도 못되고 그저 불려다녀야 하니 몸만 피곤한 것.

나는 성격이 좀 모가 나도 삐딱해도 너의 파리한 손끝과 예민한 핏대에 순종하여 함께 있는 시간이 달다.

그리하여 이제껏 본 적 없는 긍정적인 내가 된다.

이런 것은 참 좋은 것.

뭐라 해도 달콤한 것.

네가 좀 못됐어도 내가 취향과 감흥이 다른 여러 착한 사람을 알면 또 무엇해.

그것은 역시 자랑거리도 못 되고 많은 이들 가운데에 외롭기만 그지 없다.

 

-

나는 정신을 2004년에 처음 만났다.

민선언니 소개로 나간 자리였다.

난생 처음보는 한 작은 애가 시작부터 영롱한 무엇이었다. 완전히 달랐다.

 

아홉살에도 열네살에도 스물셋에도 내가 찾던 사람.

그 나이엔 어디에 살았느냐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실제로 그런 질문을 막 해댔었다.

 

글리세린을 섞은 듯 쉽게 증발하지 않는 정신의 이야기들은 뒤틀어져 엉거주춤 힘겨운 숨을 내쉬던 나를 촉촉히 펴주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십오년이 흘렀다.

서수남 하청일같이 사이 좋게 쏘다녔다.

 

이제 나는 정말 더 찾지 않는다.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덥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정신 생일을 축하해

2019 9 14 홍진경

 

출처 : 홍진경 님 인스타그램(@jinkyung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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