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미, 슬픔의 연대기

 아, 어쩌지 일기를 마저 없애버리는 걸 깜박했다 머리에서 끈적한 것이 흘러내리네 목은 아마 꺾어진 것 같은데 어쩌지 삭제하지 못한 최근의 문서들이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다니

 누가 그걸 읽으면 안 되는데, 다시 화면을 거꾸로 돌려 저 위로 휙 날아오를 수 있다면 다 말끔하게 처리하고 올텐데, 아 그나저나 누가 나를 빨리 발견이라도 하면 어쩌지

 내가 보았던 죽은 사람들은 정말 죽었던 것일까 그들은 왜 내게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어슬렁거리기만 하다 돌아간 걸까 나는 조용히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

 아, 누가 내 일기를 좀 불태워다오 빈틈없는 죽음이란 없는 거구나 허술한 죽음만이 죽음 같구나 아, 어쩌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너무 오래 아껴두었구나

 그토록 오래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이제야 이해하겠다 이제야 용서할 수 있겠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로 했구나 삶이여, 이제 나는 없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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