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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은, 마트료시카

이사를 했다

주전자엔 새 물이 끓고 있다

익숙한 데서 옮겨와

유리잔 몇 개는 꽃병이 됐다

문득 궁금했고 자주 궁금했던 친구들과 앉을

식탁엔 꽃병을 두었다 꽃도 말도 정성으로

고르고 묶으면 화사한 자리가 되어서

곁이란 말이 볕이란 말처럼 따뜻한 데라서

홀로는 희미한 것들도 함께이면 선명했다

모두들 어디로 간 걸까 왜 나만 남았을까

그런 심정은 적게 말하고 작게 접어서

비우고 나면 친구들이 와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식탁엔

커피잔을 들면 남는 동그란 자국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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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이현승, 가로등을 끄는 사람

새벽 다섯시는 외로움과 피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외로워서 냉장고를 열거나
관 속 같은 잠으로 다이빙을 해야 한다.

만약 외로운데 피곤하거나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우리는
산책로의 가로등들이 동시에 꺼지는 것을 보거나
갑작스레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뒤엔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암 환자가 보일 것이다.
구석으로 숨어든 어둠의 끄트머리를 할퀴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이 집약된,
더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열정으로 고양된 새벽,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다섯시
저기 어디 가로등을 끄는 사람이 있다.
고요히 다섯시의 눈을 감기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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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허수경, 나의 도시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 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에서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 살갗이었다가
 랩도 블루스도 기타도 현도 방망이도 철판도 짐승의 가죽으로 소리 내던 북들도 젖고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생선국 끓이던 솥도 고기 튀기던 냄비도 젖고 젓가락 숟가락 사이 들락거리던 버스도 택시도 어머니, 연을 끊지요, 라는 내용이 든 편지도 젖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잠기고 물에 들어가면서도 고무신 하나 남기지 않고
 나의 도시 도시의 장벽마다 색소병을 들고 울던 아이들도 젖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 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여,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

 물 위에 뜬 건 무의식뿐, 무의식뿐,
 건덩거리는 입술을 위로 올리고 죽은 무의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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