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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기적은 일어난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기적을 바란다. 왜 아니겠는가. 이 삶에서 안식을 얻기가 어려운데, 어딘가 깊은 곳이 상처 입었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데,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데, 왜 기적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끔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고, 기적을 기다린다. 어느 날 불현듯 눈앞에서 나타날 기적을 기다린다.

 

우리 삶도 ‘오마카세’가 유행인가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일상은 계속된다.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는데, 한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는데, 어째 내 삶을 내 손으로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가. 삶도 ‘오마카세’(お任せ, 먹을 메뉴를 요리사에게 일임하는 식사방식)가 유행인가. 세상이 주는 삶을 그대로 받아먹어야 하나. 나는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가는 건데, 이 세상의 단골은 아닌데, 이 세상 뜨내기손님에 불과한데, 이 세상이 내 구미를 알 리가 없는데, 이 세상은 자꾸 나 보고 주는 대로 먹으라고 한다.

 스스로 통제하지 않는 삶은 남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뿐. 자칭 엘리트들이 모여 자청해서 부패하는 사회에서, 자칭 엘리트들이 모여 자청해서 무책임해지는 사회에서, 그 자칭 엘리트에게 안심하고 사회의 운전대를 맡기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사고가 나도 크게 다치지 않을 고급차를 사고 숙련된 운전기사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 휠체어를 탄 사람이 공공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너무 큰 결심을 해야만 하는 사회가 여기에 있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삶을 통제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너도나도 말하는데, 월급은 조금 오르고 삶의 비용은 많이 오른다. 쉬지 않고 벌어야 한다, 라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무엇을 하고 싶기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고 있지 않다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삶의 순간들을 포기해야 하는 나날들이 이렇게 늘어난다. 삶과 돈을 교환하기도 지친 한국인에게 마침내 번아웃의 파도가 밀어닥친다. 그 파도 위에서 느긋이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영양제를 더 먹어야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주말 아침이 밝는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육신에 영혼의 존엄은 좀처럼 깃들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는 시들고,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도 시들고,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다. 잘난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분발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잘나 보이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하면 토라지는 마음이 생긴다.

 왜 이리 잘난, 아니 잘나 보이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지! 잘나 보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오늘도 하염없이 토라져 간다. 이제 고요함 속에 자신의 존엄을 길어 올리는 일 대신, 남을 무분별하게 비난하면서 자기 존재의 존엄을 찾으려 드는 사회가 되어 간다.

아파트 경비원에 왜 갑질하나

 과로로 인한 번아웃의 공포가 드리운 사회에서는, 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다. 돈으로 편의를 사고, 돈으로 쾌감을 사고, 돈으로 학벌을 사고, 마침내 도덕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 제정신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 간다. 돈이 없을 때 굴러떨어질 어두운 골짜기를 상상하며, 두둑한 잔고를 자랑스레 인증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그 인증에 환호하는 사회가 되어 간다. 그 환호로 자존심을 높이는 사회가 되어 간다. 잔고를 늘리는 데 실패한 다수는 자신이 두어 간 인생의 악수(惡手)들을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악수로 가득한 바둑판이지만, 바둑판을 엎고 게임의 룰을 다시 만들 배짱은 없다.

 

 두둑해진 잔고를 털어 그럴듯한 아파트를 사게 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존재의 자갈밭을 터벅터벅 걷는다. 존엄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 경비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가짜 존엄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에게도 평화는 없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모든 것이 헛일이 되고, 그 소중한(?) ‘갑질’도 이제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추모할 수 없다. 갑질을 못 이겨 경비원이 자살해도,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까 봐 그 경비원을 추모할 수 없다. 추모 현수막을 걷어버려라!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놀라울 정도로 자식새끼 사랑(?)은 여전히 강고하다. 자기 자식에게 험한 일을 면제해주려고 외국인 노동자를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아넣는 사회가 되어간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할 때마다 수치심이 밀려든다. 영혼의 번아웃처럼 밀려든다. 분발할 체력이 고갈된 영혼은 이제 울고 싶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은 함부로 울지 않는 법, 사회에서 허용한 울 곳을 찾아 헤맨다. 장례식장에 가면, 자신의 수치심까지 담아 남들보다 더 크게 우는 사람이 있고, 대낮의 성당에 가면 어두운 구석에서 남들보다 더 깊이 흐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인간에게 너무나 무심한 우주

 이 모든 것이 싫어진 사람들이 있다. 어쨌거나 아이를 낳고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라고 정부가 채근하기에, 더 깊이 이 모든 것이 싫어져 버린 사람들이 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을 착취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싫고, 남과 아귀다툼을 하기는 더 싫은 사람들이 있다. 주변 사람을 실망시키기는 싫은데, 주변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삶을 개선할 방안은 시야에 보이지 않는데, 살아야 할 나날들은 눈앞에 엄연히 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얼룩말처럼 용기를 내어 성실한 앞발을 세상으로 다시 내디뎌 보이지만, 이 우주는 대체로 인간에게 무심하다. 가까스로 용기를 낸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부고에 갑자기 접하게 만드는 것이 이 우주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이가 “정밀검진을 받아보셔야겠는데요”라는 진단을 듣게 만드는 것이 이 무심한 우주다. 소중한 사람에게 결국 상처를 주게끔 방치하는 것이 이 무심한 우주다.

 이래도 기적을 믿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기적을 믿는다고 하면, 머리통이 큰 사람들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기적을 믿는다니, 그건 너무 비이성적인 일이군. 기적은 인민의 아편이지, 에헴. 그러나 삶이 이래도 기적을 믿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 한국에만 수십 명이라는 자칭 구세주를 믿는다고 할 때, 생각한다. 그들이 기적을 애타게 바라게끔 했던 생의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나도 기적을 바란다. 매일매일 살아있는 게 기적이니까. 최상위권 자살률을 가진 사회에서 매일매일 살아있는 게 기적이니까.

 그리고, 가끔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어느 날 얼룩말이 예고도 없이 서울대공원을 탈출하는 거다. 거리를 한동안 우두두두 누비는 거다. 골목길에 들어선 배달 오토바이 청년이 초현실적으로 얼룩말과 마주치는 거다. 바로 그 순간 경기도 북부, 누군가 문득 참지 못하고 집을 탈출(?)하는 거다.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수원의 강연장까지 북토크를 들으러 우두두두 오는 거다. 다행히 저자는 그날도 기적처럼 살아 있는 거다.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강연은 제시간에 시작되는 거다.

수줍음 많은 남학생의 그림노트

 대부분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는 법. 그러나 우주는 어쩌다 한 번씩 저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의 기적을 허락한다. 하필 그날, 인간 대 인간의 공감이라는 그 드문 기적이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거다. 그리고 그 공감이 육화(肉化)하는 거다. 강연이 끝나자 다른 누군가 수줍게 정성 들여 쓴 손편지를 건네는 거다. 또 다른 누군가가 옆에서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거다. “계속 써주세요.” 나직하게 말하고 홀연히 자리를 뜨는 거다. 보통 엄마가 만사 귀찮은 딸을 억지로 데리고 강연장에 오는 법. 그러나 앞줄의 여고생은 자기가 엄마를 강연장에 끌고 왔다고 자랑하는 거다.

 이 모든 기적을 목도한 강연자가 이제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봄치고는 쌀쌀한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주머니 한 명과 소년 한 명이 주춤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거다. 부끄러움을 너무 타서 얼굴도 못 드는 남중생을 데리고 엄마가 버스정류장까지 왔던 거다. 얘가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대요, 라며 그림으로 가득한 공책을 내미는 거다. 펼쳐진 공책 페이지 페이지마다 자신이 직접 그린 옛 철학자들의 초상이 가득한 거다. 수많은 그림마다 어린 얼룩말 같은 제목들이 낭자한 거다. “미친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이 그림들 사진 찍어도 되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얼굴을 숙이는 소년이 수원 밤거리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거다. 마침내 서울행 버스가 도착한다. 이 모든 일이 다 현실이었다고 되새기는 버스 안, 그곳에 기적을 믿는 사람이 한 명 앉아 있다.

 

 

출처 : 더 중앙,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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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그 밤에 작은 유리병 속에 들어 있던 검은 것을 기억한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각자 자기가 있던 곳으로 떠났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토록 다정한 것들은 이토록 쉽게 깨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눈물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그것을 세월이라고 불렀다. 의식적인 부주의함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미련 속에서. 그 겨울 우리는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 거슬러 갈 수 없는 시간만이 우리의 눈물을 단단하게 만든다. 아래로 아래로 길게 길게 자라나는 종유석처럼. 헤아릴 길 없는 피로 속에서. 이 낮은 곳의 부주의함을 본다. 노래하는 사람이 너무 많군요. 웃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군요. 꽃이 만발한 세계였다. 빛이 난반사되는 어두움이었다. 너무 많은 리듬 속에서. 너무 많은 색깔 속에서. 너는 질식할 듯한 얼굴로. 어둠이 내려앉듯 가만히 앉아. 나무는 나무로 우거지고. 가지는 가지를 저주하고. 우리와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거리와 거리 사이에는 오해가 있고. 은유도 없이 내용도 없이. 너는 빛과 그림자라고 썼다. 나는 물과 어두움이라고 썼다.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검은 것 사이의 검은 것. 모든 문장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똑같은 낱말이 모두 다 다른 뜻을 지니듯이.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무수한 목소리를 잊고 잊은 목소리 위로 또 다른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사랑받지 못하는 날들이 밤의 시를 쓰게 한다. 밤보다 가까이 나무가 있었다. 나무보다 가까이 내가 있었다. 나무보다 검은 잎을 매달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사람처럼.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밤이 밤으로 번지고 있었다.

 

   사랑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사랑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어떤 말이 있다. 단단하게 굳은 말이 아니라 투명하게 비춰주는 말. 말하지 않은 말까지 드러내는 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가만히 보듬어주는 말. 돌이었던 말이 유리로 변모해갈 때, 그렇게 존재의 어둠을 걷어내고 서로의 맨얼굴을 드러낼 때, 너와 나는 둘만의 은밀한 세계로 들어선다. 중요한 단 한마디의 말은 아껴두면서. 그 아껴두고 감추어둔 말 속에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둘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아니 그 믿음을 담보하고 있는 그 언어의 허약한 속성으로 인해, 시간과 감정의 어긋남과 엇갈림 속에서 말하지 않은 말들과 말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 때, 영원히 영롱하게 반짝일 줄 알았던 가슴속의 유리구슬은 어둡고 무거운 돌이 되어간다. 유리였던 말이 돌이 되어버린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고 받아주던 마음이 이제는 그 어떤 말로도 설득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아니, 그런 사정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어느 결에 숨겨왔고 참아왔던 말들이 결국은 너와 나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그 모든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는 말들 앞에 서서, 무력한 마음으로 나약한 말의 자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예의로 우리는 어떤 말들을 목구멍 속으로 삼킨다. 우리는 어떤 말을 내뱉는 대신 그저 그것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말하지 않은 마음을 투명한 유리병 속에 넣어두는 것은 언제고 언제든 어떤 마음의 진심을 뒤늦게나마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아주 작은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은밀한 한 세계가 무너져 내려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노래하는 사람도 웃고 있는 사람도 여전히 너무나 많다. 찢어질 듯한 마음과는 무관하게, 이 세계는 존재의 본성 그대로 순간순간 아름답게 존재하면서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 대해 좋다 나쁘다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것은 흔들리기 쉽고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나무는 그저 본연의 성질 그대로 태어나 자라나고 죽고 썩는다.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난다. 다시 태어난 나무가 비록 이전의 나무는 아닐지라도. 나무는 또 다른 나무로 자라나면서 이전의 나무를 복원한다. 죽은 나무의 자리에서 돋아난 씨앗 속에 이전에 죽어 스러진 나무의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역시도 사라져간 이전의 기억을 통해, 그렇게 모르는 사이에 덧씌워진 그림자를 떠나옴으로써, 존재의 본성에 가까워진다. 아픔 없이 슬픔 없이 온전한 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은 어리석고, 마음은 헤아릴 길 없으며, 마음을 전하는 언어의 밀도는 터무니없이 희박하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의 몸에는 지나간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무수한 목소리들이 새겨진다. 말할 수 없었던 말들. 말해서는 안 되는 말들. 말로 할 수 없는 말들. 말이 될 수 없는 말들. 무수한 말들을 딛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너와 나 사이로 무언가가 내려앉는다.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검은 것 사이의 검은 것. 굳게 닫은 입속에 말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을 품고 있을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은 침묵으로 감당하고 있는 어떤 장소의 영속성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자만이 사랑의 빛과 어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장소는 밤처럼 어둡고 어두워서. 어둠의 너머에는 말 없는 나무들만이 줄지어 서 있을 뿐으로. 줄지어 서 있는 보이지 않는 나무를 바라보며 유리병 속에 남겨져 있는 검은 것을 생각할 때. 결국 간신히 말해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어떤 말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어떤 마음이, 밤의 시를 불러들인다. 말하지 못하는 그것을 종이에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시에 가까워진다. 시에 가까워지면서 말없이 죽어간다.

 

출처 : 한겨레, 토요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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