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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암호
여행을 마치며, 딸이.

2016년 엄마와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적었던 편지가 생각나 꺼내보았다. 아쉬움이 남지 않는 여행은 없겠지만 참 좋았다. 내내 행복했던 시간이 생각나서 여기도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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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식탁 머리에서 무심코 뱉은 유럽 가고 싶네, 한 마디에 정말 지구 반대편 땅을 다시 밟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엄마의 추진력을 여태 몰랐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시작된 유럽 여행은 첫 방문보다는 익숙하고, 조금 더 평화롭고, 여전히 한가로워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겠어요. 어디를 봐도 뭘 찍어도 엽서 같았던 스위스의 풍경. 아침 햇살 내리쬐는 사이로 백조와 함께 공원을 거닐었던 런던, 빨간 지붕 사이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발이 빠져가며 구경했던 프라하와 체스키까지 사실 다니는 중에도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꿈 같아요. 엄마에겐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이 책이 나오면 저도 조금이나마 알게 되겠지요?
 
 실제로는 2주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급하게 준비하며 걱정이 많았는데 그 모든 불안이 무색하게 엄마와 저 둘 모두에게 초행이었던 스위스는 다행히도 상냥한 국가였어요. 비록 비싼 물가에 식당 한 번 가는 것도 결심하고 가야 했지만 (뢰스티가 맛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다니는 내내 편리한 교통과 압도적인 자연에 와, 정말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다, 하고 얼마나 많이 말했는지 셀 수도 없어요. 역 바로 앞에 유람선이 있는 것도 신기했고 빛이 반사되는 수면과 그 너머로 펼쳐진 산들, 호숫가로 모여 있는 예쁜 집들을 보며 동화가 처음 생겨난 건 스위스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의문이 들기도 했고요. 머릿속에 있는 ‘동화’라는 단어를 그대로 구현하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특히 몽트뢰의 계절을 모르고 피어난 꽃들과 화려하게 흔들리는 수면 위로 지나가는 유람선, 노란색의 호텔 같은 것들이요. 따뜻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로 가서 내다보면 바로 앞에 에메랄드빛 강이 흐르던 인터라켄의 아침은 언제 또 제 생에 오게 될까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것도 여행의 큰 의미 중 하나인데 저와 함께하며 엄마는 이 비일상에 충분히 몰입하셨을까요? 골든 패스를 달리는 열차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흥에 겨워 절로 나오던 노랫가락은 그 즐거운 일탈의 감상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고 아쉬워졌어요. 그때는 이어폰을 꽂고 계셔서 소리가 큰지 모르시나 보다 하는 일차적인 판단이었는데 내가 방해꾼이었구나 싶고요. 그래도 낭만적인 시간이었어요. 낭만, 로맨틱, 막연하게 love에 관련된 단어로 인지해오던 것과 다르게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분위기라는 뜻이래요. 그렇다면 우리의 여행은 낭만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나요?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새롭고 선명한 자극들-예컨대 산악 열차를 타고 오르며 내려다본 리기 산에서의 까마득한 전망과 쉴트 호른에 올라 온몸으로 느낀 새하얀 눈보라 같은 것들-은 현실보다는 차라리 상상에 가까운 세상의 것이었으니까요. 이건 다 제 감상일 뿐이지만 엄마도 그랬을 거라고 넘겨짚어 볼게요. 
 
 자연과 기차의 나라 스위스를 거쳐 도착한 곳은 홈리스가 될까 걱정했던 런던. 전적으로 제 의견으로 결정한 곳이니만큼 엄마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여유의 도시에요. 겨울에 가까운 시기여서 공원에 드러눕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이드 파크의 산책하는 사람들과 온통 제 땅인 양 뛰어다니던 청솔모들, 호숫가 가득 자리를 차지한 백조와 새들은 런던 특유의 '공원스러움'을 한껏 보여줘서 괜히 벅찼어요. 아, 이번에 정말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뮤지컬이겠지만요. 오로지 오페라의 유령만 공연하는 여왕 폐하의 극장은 이름부터 어쩌면 그렇게 설레는지. 단숨에 사로잡혔던 공연은 기대 이상으로 환상적이어서 잠시 숨을 멈췄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엄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날, 그 모든 설렘과 두근거림도 걱정 앞에 움츠러들더라구요. 외지에서 단 한 명 서로 의지할 수 있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엄마가 언제나 제 모든 우선순위를 앞선다는 걸 알고 계실까요. 항상 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엄마가 건강하고 자유롭게, 원하시는 모든 행복을 즐기며 함께 하는 거예요. 기억 속의 런던은 조금 더 무섭고 컸던 것 같은데 함께하는 사람이 엄마인 것만으로 뭐든 만만하게 느껴지는 건 놀랍고 즐거운 일이었어요. 얼마나 큰 존재이자 사랑이고, 안심 그 자체인지 계속 말해드리고 싶어요. 낯선 나라에서도 곧잘 제집인 양 누비고 다니는 것으로 보였다면 엄마와 함께였기에, 그게 이유의 전부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그만큼 제가 믿음직스러운 딸이었냐면, 음.
 
 세상도 저도 그대로인데 시간은 어쩜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여행을 시작하고 들숨 한 번, 날숨 한 번 뱉고 나니 프라하 공항의 한글이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바로 앞에 숙소를 두고 덜덜거리는 캐리어를 끌며 뱅글뱅글 돌아 도착한 거리는 제게는 다소 익숙한 낯으로 다가왔는데. 엄마의 첫인상은 어땠을까요? 그날 나누었다면 좋았을 질문이 자꾸만 생각나네요. 흔하게 놓쳐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닦아내어도 제때의 빛을 품진 못하겠지만 이렇게나마 되새겨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같은 식당을 네 번이나 찾아가 마셨던 코젤 다크와 핫윙, 천문시계의 정각 쇼. 까를교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즉흥적으로 감상했던 오르간 공연이나 그저 거리를 걸으며 웃고 떠든 순간들도 분명히 이 특별한 여행을 모자란 부분 없이 채워주고 있지만요. 체스키의 붉은 지붕들 사이로 친절한 집주인이 알려준 식당을 찾아가는 길에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이는 엄마가 얼마나 예쁘고 잘 어울리던지 몰래 뒷모습을 담기도 했어요. 사진이 늘어갈수록 그 꿈같은 시간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생각에 문득 섭섭해하면서요. 같이 올려다본 황금빛 하늘과 늘어진 구름은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에서 그 색채로 타오르고 있겠죠? 달라진 건 고작 두어 달의 날짜뿐인데도 더는 그곳의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네요. 그 이상 친절할 수 없었던 펜션의 후기도 쓰기 전인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들은 내게 위로가 되었다- 하는 말을 봤던 게 기억나요. 그럼 이건 약간의 그리움과 다시 보게 될 기대가 섞인 건가 싶구요.
 
 제목과는 다르게 제 여행기를 써 내려 간 것 같아요. 두서없이 늘어놓은 여행에의 소감들은 쓴 것보다 쓰지 못한 게 더 많지만요. 우리를 아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와 함께 한 2주의 시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풍성하게 다가왔어요. 다만 몇 번이고 언급했던 익숙함과 기억 속의 유럽이 모든 면에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은 생소한 깨달음이었어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처음의 소중함, '유럽'의 모든 게 경이로 다가오던 그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엄마가 만끽하는 데 아주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면 그게 저를 조금 더 보람차게 만들어 줄 것 같아요. 반드시 찾아올 다음에는 가이드보다는 온전히 사랑 가득한 딸로 함께해요. 사랑하는 엄마. 언제나 감사하고 사랑해요. 함께여서 더 의미있었던 엄마와 단 둘만의 첫 여행을 마치며 겨울의 한 때로부터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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