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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슬픔의 연대기

 아, 어쩌지 일기를 마저 없애버리는 걸 깜박했다 머리에서 끈적한 것이 흘러내리네 목은 아마 꺾어진 것 같은데 어쩌지 삭제하지 못한 최근의 문서들이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다니

 누가 그걸 읽으면 안 되는데, 다시 화면을 거꾸로 돌려 저 위로 휙 날아오를 수 있다면 다 말끔하게 처리하고 올텐데, 아 그나저나 누가 나를 빨리 발견이라도 하면 어쩌지

 내가 보았던 죽은 사람들은 정말 죽었던 것일까 그들은 왜 내게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어슬렁거리기만 하다 돌아간 걸까 나는 조용히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

 아, 누가 내 일기를 좀 불태워다오 빈틈없는 죽음이란 없는 거구나 허술한 죽음만이 죽음 같구나 아, 어쩌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너무 오래 아껴두었구나

 그토록 오래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이제야 이해하겠다 이제야 용서할 수 있겠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로 했구나 삶이여, 이제 나는 없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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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조용미,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할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초라했는지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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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최승자, 20년 후에, 芝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眼)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江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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